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 (문단 편집) === 계엄군과 신군부의 폭동 === [include(틀:관련 문서, top1=5.18 민주화운동/학살)] 모든 계엄군이 일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으나, 여러 증언과 자료를 종합하면 당시 계엄군의 만행은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 이는 어느 정도는 [[반공주의]]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부합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어느 정도는 [[자기합리화]]와 [[PTSD]][*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난 일방적 학살자가 무슨 PTSD인가 생각하겠지만, 마약을 안 하고도 마약한 것과 같은 경험이 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상상하면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강렬한 자극은 [[마약]] 혹은 [[연쇄살인]]이 아니고서는 재현할 길이 없다.][* 해당 계엄군의 PTSD를 다룬 작품으로는 영화 [[박하사탕(영화)|박하사탕]]이 있다.], 집단광기의 사례로 볼 수도 있다. 다음은 당시의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자료들이다. 국제인권감시단 아시아 지역 담당 지부에서는 계엄군을 [[SA|나치돌격대]]에 비유하기도 했다. >회사원 조정석 씨(35·당시 대학 1년)는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광주공원 근처를 걷던 조 씨는 착검한 M16 자동 소총을 든 공수대원 2명으로부터 ‘이유 없는 추격’을 받았다. 필사적으로 도망친 그가 겨우 몸을 숨긴 곳은 남의 집 창고 속 연탄더미 뒤였다. 거기까지 쫓아와 연탄더미를 칼로 일일이 찔러보던 공수대원은 퇴각 명령을 듣고서야 '''아까운 사냥감 하나 놓쳤다'''고 말하며 철수했다. 광주에서 그 정도는 얘깃거리조차 못 된다. 유언비어라는 이름으로 떠도는 학살극만 해도 부지기수다. 그러고도 공수부대가 앵무새처럼 되뇌는 소리는 자위권 발동이라는 ‘공자님 말씀’이다. > -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6324|5·18 주범만큼 무거운 ‘하수인’의 죄 - ‘피의 광주’ 하급 지휘관·사병도 책임…목격자들 “그들은 인간 사냥꾼”]] >(중략) 다음은 그날 그가 광주계엄군으로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 해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가 [[광주광역시|광주]]에 투입되기 전 상관들은 광주에서 반정부 반란군이 도시를 점령하며 시위를 하고 있고 그들은 모두 '빨갱이'나 좌경분자들이라고 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상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런 '빨갱이들'에 대해서 자연히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광주에 투입된 우리들은 총에 대검을 끼고 실탄을 넣었다. 비록 상관의 명령이었지만 나는 그 대검으로 '빨갱이'들을 찌르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했다. 잡혀온 '빨갱이'들은 개처럼 두들겨 패고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겼다. 진압봉과 개머리판 그리고 군화발로 온 몸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처음에는 길가에 서 있던 시민들이 우리 군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몇 몇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실제 사람을 패서 죽이고, 총으로 쏴서 죽이고, 대검으로 찔러서 죽이는 것을 몇 번 보는 순간부터는 감히 항의하는 시민도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우리를 무서워하며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잡혀 온 수백 명의 남녀노소 '빨갱이'들은 넓은 공터에서 우리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들은 우리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었다. 오리걸음으로 선착순을 반복했고, 그중에서 늦은 '빨갱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으로 죽도록 맞았다. >나는 광주시내 여기저기서 죽어 넘어져 있는 시신도 여럿 보았다. 어떤 군인들은 "전라도xx들은 다 죽여야 해"라고 떠들기도 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감히 빨갱이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치고 다녀" 하며 잡혀온 민간인들에게 심한 분노와 증오를 품었다. >한 번은 밤에 어디서인지 모르는 방향에서 갑자기 날아오는 돌에 맞아 전우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했다. 이 일로 '빨갱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더욱 커갔다. 그 후 우리 손에 잡히는 '빨갱이'들을 더욱 무자비하게 죽였다. 사방에서 터지는 총성과 최루탄가스 연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리는 고함, 비명, 절규들은 생지옥을 연상하게 했다. >우리들은 물이 없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면도도 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이런 상황을 초래한 '빨갱이'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전우 중에는 지난 밤 몇 놈을 대검으로 통쾌하게 찔렀노라고 자랑삼아 말하던 이도 있었다.'''"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95511|그 형은 광주의 계엄군이었다, [기고] 누가 진정 광주의 가해자였는가]] >- 김성수 <함석헌 평전> 저자 >88년 국회 광주청문회등을 통해 양심선언한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동료들의 협박''' 등으로 시달리고 있다. >『89년 1월 청문회에서 양심선언한 뒤 같은 동료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전화를 걸고 집에도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한때는 협박 때문에 자살도 시도했습니다. 뒤를 이어 양심선언하겠다는 동기생이 있었지만 제가 협박당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뒀습니다.』〈7공수 33대대 최영신(崔永信.41.중사) 씨〉 >(중략) >〈「광주로 간 군인들」이 연재되는 동안 독자뿐만 아니라 당시 광주에 있었던 공수부대원들부터 수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증언자 상당수는『네가 그런 소리 했느냐』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3188145|<광주로간군인들>6.끝.아물지 않는 후유증]] '''[[폭동적 시위진압|계엄군들은 시위와 전혀 상관없는 지나가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쏴 죽인 것은 물론 부상당한 시민들을 불법으로 처형하고 물놀이하던 아이들까지 쏴 죽였으며, [[UH-1|헬기]] 사격과 [[강간]][* [[http://v.media.daum.net/v/20180509050635986?d=y|#1]] [[http://v.media.daum.net/v/20180510050606831?rcmd=rn|#2]]]등을 자행하기도 했다.]]''' 2000년 5월 19일 MBC 스페셜 (충정작전, 그후 20년) 방송 내용에 따르면 [[전우회|특전동지회]] 회원들이 7공수여단 출신 최영신이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의 진실을 증언하자 오히려 그에게 협박은 물론 테러까지 가한[* 심지어 위의 기사에도 나오지만 최영신 말고도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다.]사례가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626206|#]] 게다가 1989년 3월 9일에는 KBS가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프로그램 '광주는 말한다'에 대해 항의 농성을 벌이며 "여기가 대한민국이냐, 북한이냐? 너희는 빨갱이 방송국이다"라고 비난하며, 같은 연도에는 특전동지회 회원 2명이 ‘어머니의 노래’를 만든 김윤형 프로듀서 등 3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9/1819307_19354.html|#]] 이런 사건을 저지르고도 1998년 뉴스 인터뷰에서는 피해자 행세를 했으며,[[http://v.media.daum.net/v/19980516165300139?f=o|#]][* 11공수여단 63대대 출신자들도 그랬다.[[http://www.nocutnews.co.kr/news/1047690|#]] 기사에서는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 기록들을 보면 저 [[5.18 민주화운동/학살|11공수여단 63대대]]는 그냥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남녀노소 무차별 묻지마 폭행 및 가혹 행위, 진월동 원제마을에서 주변에 있던 물놀이하던 초등학생들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에 대한 무차별 난사를 저질러 살해하였다.] 게다가 몇년 뒤에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했을 때 또 한 번 '화려한 휴가'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거짓으로 국민과 군 간에 적대감을 조성한 것 같이 이번 기자간담회에서 국민과 특전사를 이간질 및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그 저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라" 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85348|#]] >양심선언을 한 최영신 씨는 "주남마을 양민 학살을 증언한 것이 내가 제일 잘 한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를 받았으면 지금도 살아있었을 것이다. (상관이 부대원들에게)'처단해라' 이야기 했고 조금 이따가 총성이 들렸다. 소나무에 핏자국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저항할 수 없는 중상을 입은 사람들을 사살하라고 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당시 거기 있던 계엄군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총을 직접 쏜 군인은 사망한 상태였다. 처리하라고 명령한 장교는 포도밭을 운영하며 귀농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38년 전 일 때문에 찾아왔다"는 제작진에게 "나도 피해자다. 군인은 피해자 없냐. 죽지만 않았을 뿐이다. 군인이 장교로 진급 못 하면 피해자지. (계급장) 하나만 더 달았어도 내가 이렇게 고생 안한다. 그때 연금만 탔어도"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내가 무슨 사람을 죽이라고 하나. 헬기 요청을 했는데 헬기가 끝났다. 우린 철수해야 한다. 헬기도 없고 철수하는데 못하니까 '난 못하니까 데려가라' 그런 거다. 주머니에서 실탄이 나왔다. 그건 분명히 폭도다. 우리가 북한하고 전쟁 붙었다. 그럼 총으로 쏴야 하냐, 맞아 죽어야 하는거냐.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 있지만 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한다. 38년 됐으면 끝났지 않냐. 6.25도 다 캐고 다니는 거냐. 나도 피해자다"고 말했다. >고 김부열 씨가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시신사진을 보면 그는 얼굴이 없다. 법의학자들은 "목은 부패에 의해 없어진 게 아니다. 누군가가 얼굴 부위를 강제로 훼손했을 거다", "목은 사후 분해로 보여진다. 생전에는 절단할 수 없다. 남아있는 몸에서 사인을 찾지 못한다는 건 없어진 부위에서 사망 원인이 있다는 거다"고 분석했다." >11공수여단 간부였던 김 소령은 "아무것도 없는데 사살 당했다. 선의의 피해자다. 우리는 반은 선의의 피해자다"고 주장했다. >5.18 관련 기무사 내부 문건을 보면 [[군인]] [[사찰]] 내용이 나온다. '''[[전역]] 후에도 기무사는 그들의 언행을 면밀히 파악했다. [[입막음|혹시라도 양심선언을 하는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감시한 것이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양심선언을 한 최영신 중사는 "수없이 협박 받았다. 무서웠다. 오죽하면 가스총을 지니고 다녔다"고 털어놨다. 그는 "내가 양민학살 증언을 할 때 집사람이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서로 피해다녔다"고 밝혔다. > >[[양심선언]] 후 사찰당한 5.18 당시 계엄군 간부는 기무사가 작성한 문건을 보고 "기가 막힌다. 나를 완전 범죄자로 만들었구만. 무서운 사람들이다. 아주 생사람 잡는다. 쓴 내용도 안 맞다"고 말했다.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현장도 목격한 그는 "보니까 집중사격을 했더라. 김 장군이 보더니 '''"이놈들 확실히 처리했네?"'''라고 했다." 확인사살까지 했다는 뜻이다"고 말했다. > >김 장군은 전직 [[국방부 장관]]이다. 그는 "버스에 가지 않았다. 학살하고 죽였다는건 처음 듣는다. [[신멸작전|그 사람들이 다 무고한 사람들인지 데모대에서 총질한 사람인지 어떻게 아냐. 나는 양심을 가책을 받는 게 없다. 국민의 군대로서 주어진 소임을 다 한 것이다]]"고 입장을 밝혔다. >- [[그것이 알고 싶다]] - 잔혹한 충성 제2부 '학살을 조작하라' ([[http://newsen.com/news_view.php?uid=201805200018312410|#]]) >최씨는 양심선언 후 "홀가분했고,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의 양심선언 후 관련자들의 고백이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국방부는 최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반박했고, 그는 같이 군생활을 한 일부 동료들에게도 [[배신자]]로 여겨졌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가 그 때 양심선언 한 것에 대해 잘했다는 동료들이 절반, 싫어하는 동료들이 절반이에요. 경조사 자리에서 만나도 광주 이야기는 [[금기]] 사항이죠. 어느 날은 술을 마시고 [[후배]]가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묻기도 했죠."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0241789020345|단죄 못한 5·18 계엄군 범죄 - ‘5ㆍ18 김 소령 악행’ 알린 최영신씨 “계엄군 양심고백 이어질 줄 알았는데…”]]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47166|5.18 진압 후 웃는 계엄군…38년 만에 동영상 공개]] 2018년 5월 10일에는 5.18 38주년을 앞두고 신군부 지휘관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공개되었다.[* 저 영상 속에서 웃는 군인은 [[소준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